Page 215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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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사라지기도 하는 모양을 취하지만 한마음은 일어난 적도 없고 사라
진 적도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수행은 무생의 도리
에 계합하는 실천이라야 한다. 이미 갖추어져 있으므로 그것을 바로 알
고 안착하면 되는 것이지 일부러 닦아 얻을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입장
이므로 마조스님에게 있어서 공을 관하고 선정에 드는 수행 자체가 조
작에 해당한다. 그래서 아공我空의 선정에 머무는 성문이나 아공, 법공
法空의 도리에 침잠해 있는 보살이 부정된다. 마음 밖에서 따로 법을 구
하는 수행 방편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마조스님이 상근기의 중생을 성문이나 보살의 위에
두었다는 것이다. 선지식을 만나 이 마음이 부처이고, 평상심이 부처라
는 가르침을 받았다 하자. 성문과 연각과 보살은 각자 그 지향하는 바
에 기초하여 가르침을 듣고, 생각하고, 수행한다. 마조스님은 이렇게 분
별적 지향을 내려놓지 못하고 마음의 밖에 깨달음을 설정하는 수행자
를 둔근아사鈍根阿師라 불렀다. 이에 비해 상근기의 중생은 가르침을 듣
는 즉시 불성을 돈오하므로 모든 수행자의 위에 둔 것이다. 상근기는
마음이 이미 갖추어져 있어 생성과 소멸을 벗어난 무생無生의 차원에
있음을 알아 바로 그 본성을 돈오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성철스님 역시 지위론을 벗어나 찰나에 구경무심지에 진입하여 정각
을 성취하는 이것을 선문의 특장점으로 강조한다. 그런데 이렇게 단번
에 무생의 도리에 계합하는 돈오는 여래의 원각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성철스님은 두말없이 조사선의 돈오와 여래선의 원각이 동일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무생법인과 여래청정선은 모두 생멸 없는 실상에 대한
깨달음을 가리키는 말들이라는 것이다. 여래선이라는 용어는 그 함의
가 확장되는 역사를 갖는다. 초기에 그것은 불타의 지위에 들어 여래의
제5장 무생법인 ·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