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85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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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성철스님은 왜 오매일여에서 몽중일여를 버리고 숙면일여의
차원만을 인정한 것일까? 우리는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 부처와 중생
이 다르지 않음, 혹은 미혹과 깨달음이 다르지 않음을 알고, 이해하고,
직접 실증하는 길을 걷게 된다. 그리하여 돈오라 정의하든 증득이라 표
현하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도달처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확신이 드는
그런 자리를 만나게 된다.
문제는 이것의 지속성에 있다. 깨달음이란 ‘본래 있었고 지금도 있는
(本有今有)’ 부처의 지혜를 확인하는 일이다. 따라서 ‘한 번 얻어 영원히
상실하지 않아야(一得永得)’ 진짜 깨달음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지배
하는 뿌리 깊은 분별의 습관이 되살아나 그 깨달음을 다시 어둡게 하
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돈오점수의 입장에서는 분명한 자성의 자리를
한 번 본 일을 돈오견성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돈오견성이 있고 난 이
후에도 분별의 군대가 권토중래하여 망상의 나라를 복원할 수 있다. 그
래서 이를 차단하고 깨달음의 왕국을 영원한 반석 위에 올리기 위한
수행이 필요하다. 요컨대 돈오 이후의 수행을 통해 그 분명하게 확인되
는 자리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다 보면 마침내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점수의 논리이다.
이에 비해 성철스님은 깨달음의 체험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면 그
것은 유심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망상이라고 규정한다. 망상이므로 지키
고 보호할 것이 없다. 모두 내려놓고 더 간절하게 화두를 드는 일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성철스님의 주장이다. 그리하여 동정 간에, 혹은
몽중 간에 지속됨을 넘어 숙면시에도 지속되는 경우라야 비로소 깨달
음에 도달할 수 있는 입구에 선 줄 알라고 말한다.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의 이 기준을 성철선의 ‘세 가지 관문(三關)’으로 부르기도 한다.
성철스님에게 비판적인 학자들은 이러한 단계 설정이 돈오돈수만을 주
제8장 오매일여 · 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