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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 설정하는 모순을 범했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성철스님의 이러한 단계와 지위의 부정은 화두선의 실천과 뗄 수 없
는 관계에 있다. 화두선은 실천하는 행위가 있으므로 유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화두 자체가 무심의 실천이므로 화두를 드는 일은 무위가 된
다. 화두참구는 끝없이 밀고 나가므로 추구하는 바가 있는 것처럼 보인
다. 그렇지만 까맣게 모르는 자리에 거듭 나아가므로 한결같이 추구하
고 욕망하는 바가 없어 부처님의 선정과 동일하다. 이처럼 화두선은 간
절함으로 일관하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욕망하는 바가 없다. 화두
자체가 무심이므로 유심 차원의 이해인 해오를 비판하는 근거가 된다.
한편 오매일여에 대한 비판적 논의들은 결국 오매일여의 근거가 희박
하다는 비판, 그것이 실경계 체험일 수 있는가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된
다. 이와 관련하여 오매일여의 문헌적 근거가 박약하다는 비판이 있다.
특히 오매일여에 대한 옛 선가 서적의 논의들이 성철스님의 주장과 다
르다는 논의가 자주 제기된다. 당장 오매일여 설법을 위한 첫 번째 인
용문인 현사스님의 법문이 오히려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아는 마음(心)
이 자성(性)과 다른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문장이라는 지적이 제기된
다. 나아가 간화선의 주창자인 원오스님이나 대혜스님이 말한 오매일여
도 숙면시의 비춤이 항일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지적도 제
기된다. 그리하여 오매일여는 깨어 있을 때와 잠잘 때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론의 원론적 표현일 뿐, 항일한 상태를 상정하는 것 자체가 분별에
해당한다는 지적까지 나타난다.
소소영영한 작용이 그대로 본체(作用卽性)라고 본 마조스님, 혹은 임
제스님의 관점에 대해 현사스님이 부정적 입장을 취했다는 지적은 틀림
이 없다. 그리고 성철스님이 인용 과정에서 그 맥락을 무시하였다는 지
적도 옳아 보인다. 사실 성철스님은 문장 인용의 곳곳에서 원래 맥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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