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89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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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어긋남을 감행한다. 옛 문헌의 문장들을 편의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부분도 흔하게 발견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성철선의 특징이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
리의 논의는 성철스님이 숙면일여를 내용으로 하는 오매일여의 실경계
를 체험하고, 그것을 투과하는 체험을 하였다는 최초의 진실을 믿는 데
서 비롯된다. 그렇지 않다면 『선문정로』의 전체 설법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다시 문헌적 문제를 검토
해 보면 전혀 다른 이해가 일어난다.
우선 성철스님이 옛 문헌을 편의적으로 생략하거나 재구성하여 인용
하였다는 점을 살펴보겠다. 성철스님은 자신의 수행과 깨달음이 옛 불
조들과 다르지 않음을 확신하는 입장에 있었다. 따라서 문장에 묶이
지 않고 그것을 활용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현대 학문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의 왜곡에 속하지만 옛 한자문화권에서는 흔히 일어났던 일이기도
하다.
예컨대 『시경』의 연애시에서 한두 구절을 단장취의하여 도덕률을 선
양하는 문장에 활용하는 경우를 들 수 있겠다. 그것은 옛 성현과 완전
히 하나가 되었거나 그것을 능가하는 정신적 성취를 거둔 증거로 이해
되기까지 하였다. 성철스님은 자신의 수행과 체험에 대한 확신이 있었
고, 옛 문장의 맥락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가져다 활용하는 입장에 있
었다.
흔히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핵심이 창작하지 않음에 있다고 생각하지
만, 원래 ‘술述’은 옛 사람의 말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는 심화된 재해석과 새로운 관점의 제시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성
철스님의 문헌 인용은 그런 점에서 술이부작의 전통에 맞닿아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제8장 오매일여 · 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