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08 - 정독 선문정로
P. 708
원교에서는 42품의 무명을 끊으므로 그 차원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다.
여기에서 말하는 총 42품의 무명은 제8식 차원의 미세번뇌에 속하
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10신에서 견사혹과 진사혹의 거친 번뇌를 모두
멸진하는데, 이 자리가 진정한 수행을 위한 출발의 조건이 되는 셈이
다. 이후 10주 초주에 견성하여 마지막 남은 제8식 차원의 미세번뇌를
멸진하게 되는데, 거기에 42품의 무명을 끊는 어마어마한 지위의 승급
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3아승지겁을 거쳐야 궁극의 깨달음에 이
를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 분파분증에는 하나의 큰 시작점이 있다. 10주의 제1주, 즉 초주
에서 견성을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깨달아 견성하는 이 사건이 없이는
부분적으로 증오해 나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초주 견성을 전
제로 하는 분증은 천태와 화엄에서 볼 때 결코 하찮은 단계가 아니다.
오죽하면 석가의 화신으로 불렸던 천태스님이 열반하면서 ‘자신은 아직
분증의 지위에 들어가지 못한’ 범부의 자리에 있었다고까지 밝혔겠는
가? 그러니까 원교에서 분파분증은 견성 이후의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단계가 수행의 의지를 꺾는 부정적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미혹(견혹), 대상에 대한 집착으
로 인한 미혹(사혹), 공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미혹(진사혹)을 끊는 일만
해도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 견사혹, 진사혹의 단멸이 본격 수
행의 출발도 아니고 예비 단계의 일에 불과하다면, 그 이후는 얼마나
까마득한 차원이겠는가? 이로 인해 수행의 의지가 꺾이고 깨달음을 미
리 포기하는 경우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천태스님은 이러한 부작용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리고 그와 동시에 함부로 깨달음을 자처하는 폐단을 함께 차단할 필요
708 · 정독精讀 선문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