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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깨달음의 원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원인이 궁극적 깨달음인 묘각
이라는 결과를 품는다. 전체 법계가 청정한 마음의 바탕에서 일어난 것
이라는 법계연기法界緣起의 도리이다. 이에 의하면 원인과 결과가 모두
본래의 청정한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성불을 향한 원인과
결과가 원융(因果圓融)하다. 청정한 마음이 만법의 근본이고, 법계의 본
체가 청정한 마음이다. 그러니까 10주 초주는 이후의 모든 결과를 내
포하는 부처로서의 정체성을 갖추는 지점이 되는 셈이다. ‘초발심(10주
초주)의 시기에 바로 무상정등각을 성취한다’는 선언이 가리키는 바가 이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지위적 차별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10주, 10행,
10회향을 거치면서 여래의 동체대지와 동체대행과 동체대원을 증득하
여 자비와 지혜를 통일시켜 나간다. 그 뒤 10지의 초지에서 제7지에 이
르기까지 생멸 없는 법의 이치에 순응하며 시간을 들여 태아로서의 성
인을 기르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는 다시 제8지에 진입하여 무생법인
을 성취하여 의식적 행위조차 없는 수행에 들어간다. 제8지에 이르러
의도적 수행이 종식되고 무공용의 수행이 전면화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논의하는 입장에 따라 제9지, 혹은 제10지에 이르러서도 수행이 필요
하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자면 10주 초주에서 10
지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진여를 한 조각씩 증득하는 분진의 단계가 세
워지는 것이다.
화엄의 분진은 천태의 분파분증과 기본적 논리구조에 있어서 동일하
다. 초주에서 묘각에 이르기까지 42품의 무명을 끊어낸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다만 미세망상이 단절되는 시점이 다르다. 천태에서는 초주
에서 등각까지가 근본무명을 끊는 단계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화엄에
서는 제8지, 제9지, 제10지에서 세 가지 미세번뇌가 끊어진다. 구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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