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3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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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교50년지(朝鮮開敎五十年誌)』 번역 • 343
다. 奧村師의 기쁨은 실로 말로 형언할 길이 없을 정도였다.
어쨌든 奧村師는 五百子여사의 일행을 거처로 인솔하고 오랜만에 이
야기 삼매경이 되어 광주 개교의 갖가지 고심을 털어 놓었다.
여느 때처럼 진취적 성향의 五百子여사는 10월 7일 정장 차림으로 시
가를 빈틈없이 시찰하였다. 호기심 많은 조선인들이라 시장 근교의 사
람이 여기저기서 모여 五百子여사 일행을 둘러싸서 한때는 시장 교통이
차단되는 등 소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五百子여사는 奧村師의 동도(東道)에서 尹雄烈氏와 회견하고, 광
주 개교는 실업을 장려해야 함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스스로 그 임무를
담당하겠다고 하고, 3일간 체재하고 광주를 떠났다.
五百子여사가 떠난 뒤 奧村師는 마침내 개교에 힘쓰면서 오로지 조선
인을 만나고자 하였다. 奧村師의 수기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
고 있다.
우리는 한결같이 한인을 접대하고 진속이제(眞俗二諦)의 종의를 전
하고 생계에 힘써야 할 것을 전하고, 또한 내세가 안심되면 아미타
불의 법으로 어럽지 않을 것이라고 [전하였다]. 또한 시인이 방문하면
101)
분운(分韻) 하며, 이러한 일들을 힘들어하지 않고 백방 유인하여
노력한바 멀고 가까운 데서 승려와 속인이 방문하였다. 비 오는 날
을 제외하고 하루도 헛된 날 없이 때때로 관찰사 경무소 사람이 방
문하여 교의(交誼)를 돈독하게 하였다. 또한, 광주부에서 1리 떨어
진 무등산 증심사(無等山 證心寺) 주승 화남(化南)이 나의 거처를 방문
101) 운자(韻字)를 정하고 여러 사람이 나누어 집어서 그 잡힌 운자로 한시를 짓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