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고경 - 2018년 7월호 Vol. 63
P. 43

족이 나라를 세우면 권력과 이권을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이 보통이
            다. 고생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영광을 함께 하기는 힘든 법. 통치 경험이 거
            의 없고 문화적 소양이 그렇게 높지 않은 흉노족 등 소수민족들이 먼 앞날

            을 내다보고 다른 민족에게 권력과 이권을 나눠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

            다. 특히 하루아침에 귀족이 노예가 되고 노예가 왕이 되는 분열과 전쟁의
            시대에, 자신들이 세운 나라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멀리 내다보며 ‘종
            족중심주의’를 극복하자고 소리칠 사람의 숫자는 매우 적을 것이다. 십육

            국 시대의 여러 나라들이 단명했던 주된 이유는 ‘종족주의를 극복하지 못

            한 것’과 ‘갈등의 소지가 있는 군사제도’ 이 두 가지 때문이었다고 판단된
            다. 물론 종족중심주의 혹은 ‘자기민족 중심주의’를 현명하게 극복하지 못
            한 것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흥기하는 저족 부견의 전진前秦


              불에 타 버린 바로 그곳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하나가 쓰러지면 다른 하

            나가 일어서는 것은 세상의 이치. 후조의 멸망이 그러했다. 흉노계 국가가

            사라진 그 터전에 저족과 강족은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고자 적극적으로 힘
            을 모았다. 한창 기세를 올릴 당시의 후조는 섬서성을 정복한 뒤 그곳에 있
            던 저족과 강족을 하남성 북부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349년 후조가 붕괴

            될 조짐을 보이자 이들이 일제히 서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족은 추

            장인 부홍(苻洪. 285∼350∼350), 강족은 요익중(姚弋仲. 280∼352) 휘하로 모여
            들어 관중으로 물밀듯이 향했다. 갑작스레 사망한 부홍을 대신해 그의 아
            들 부건(苻建. 317∼350∼355)이 장안에 들어가 351년 천왕 대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진大秦이라 칭하고 다음 해 황제에 등극했다. 관중



                                                                         43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