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3 - 고경 - 2019년 2월호 Vol.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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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왜 그런가? 『방광반야경』은 ‘사물·생각[법法]은 오고 감이 없고, 움
직여 변해감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라는 부분에서, 축법호가 이전
에 『대품반야경』을 번역했는데 이를 『방광반야경』이라 한다. 이 경은 첫
머리에 광명 여래가 빛을 발해 신통을 보이는 사실 등에 따라 경전 이름
을 그렇게 정했다. 그 경전은 “존재는 가고 옴이 없다.”라고 말했다. 어
떻게 삶과 죽음이 교대로 바뀜이 있겠는가! 또한 “움직여 변해감이 없
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추위와 더위의 뒤바뀜이 있겠는가! 물론 통하는
말이지만 반드시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는 승조 스님의 말
이지, 경전의 구절이 아니다.
③ “尋夫不動之作, 豈釋動以求靜”, 釋者捨離. “尋《放光經》作不動之
語”者, 非謂捨動而別論靜, 即求靜於動法之中, 即動而為靜耳. 言“豈
釋”者, 不釋也. “必求靜於諸動”下, 覆上意可見也.
③ “『방광반야경』이 말하는 ‘움직임이 없다.’는 의미를 생각해보니, 어
찌 움직임을 떠나 ‘움직이지 않음’을 찾으라는 것이겠는가?”에서, 석釋
은 버리다·떠나다는 의미다. “『방광반야경』이 말한 움직임이 없다는 말
의 의미를 찾아보니”라는 것은 움직임을 버리고 별도로 움직이지 않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즉 움직임 속에서 움직이지 않음을 찾으라는 것이
며, 이는 바로 움직임이 바로 움직이지 않음이 된다는 것이다. “어찌 떠
나서”라고 말하는 것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드시 만물의 ‘여러 움
직임’에서 ‘움직이지 않음’을 찾으라는 것이다.”라는 구절 이하 부분에서,
다시 앞의 의미 즉 “떠나지 않는다.”는 뜻을 알 수 있다.
[주석 2-3. 중오집해] ① “夫生死交謝, 寒暑迭遷, 有物流動, 人之常情
也.”: 生死存亡, 正報交謝. 暑去寒來, 依報送遷. 謂有依正之物遷謝. 流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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