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2 - 고경 - 2019년 2월호 Vol.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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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과 차이가 드러나자, 후진의 태자의 요청으로 이 소품경도 재역하

           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마라집 이후 중국불교계에서  『대품반야경』과 『대
           지도론』에 집중 연구 주석하고, 소품경은 거론되지 않은 현상을 남겼다.

             ④ 『백론』은 두 번 번역되었다. 먼저 홍시 4년(402)에 1차 번역을 시도
           하여 승예僧叡가 서문을 지었으나, 구마라집이 아직 중국의 한어漢語에 능

           통하지 못했고 그 서문도 조예롭지 못했다고 하는데, 초역본은 전하지 않
           는다. 이후 홍시 6년(404) 2차로 번역하여 문장이 바르게 되고 승조僧肇가

           지은 서문도 좋은 것이 현재 전하는 백론이다.
             ⑤ 『중론』은 현재 한 가지만 존재하지만, 원래 두 번 번역한 것으로 추

           정하고 있다. 홍시 11년(409)에 번역되어 승예가 지은 서문과 함께 전해지
           는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그런데 일부의 연구에 의하면,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담영曇影이 지은 서문이 첨부된 중론의 초역初譯 혹은 시역試譯이
                                     3)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⑥ 『십이문론』은 중론을 요약한 논서의 성격이 짙어, 중론과 함께 홍시
           11년(409) 중론과 동시이거나 중론 직후에 번역되었다고 본다.                 4)

             이러한 삼론 계통의 경론들이 한역되자 구마라집 문하의 수많은 학자
           들에 의하여 삼론이 연구되기 시작했고, 구마라집 이후 여러 왕조들의 정

           치적인 변란 등을 계기로 제자인 도생道生·승예 등에 의하여 남방南方에
           전해졌다. 다소의 세월이 지나 섭산에서 승랑이 삼론학을 부흥시키고, 이

           후 승랑에게 수업한 승전과 그 제자 법랑을 거쳐, 법랑의 제자 길장에 이







           3) 塚本善隆, 「구마라집론鳩摩羅什論(2)」, 『干潟博士古稀記念論文集』 p.357.
           4) 平井俊榮, 『중국반야사상사연구中國般若思想史硏究』, 東京 春秋社, 1976,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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