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9 - 고경 - 2019년 4월호 Vol.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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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반야이다. 왜 그런가? ② 반야가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형태도 이름도 없고, 반야가 없다고 말하고 싶으나 성인은
그것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신령스러움을 발휘한다. 성인이 반야로 (사물
을) 인식하고 신령스러움을 발휘하기에 (반야는) 형체도 모습도 없지만 인
식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반야가 형체도 이름도 없이 (대상을) 인
식하나 ‘없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식하지만 ‘없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기에 성인은 세속에 있어도 (반야의) 공성空性을 바꾸지 않는다. 형체
도 모습도 없지만 반야의 인식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기에 성인은 모
든 활동을 통해 중생들을 교화한다. 따라서 반야의 작용은 잠시라도 멈춤
이 없고, 형체와 모습을 찾아보면 조그마한 것도 얻을 수 없다. ③ 그래서
동자 보적은 “(반야에는) 미혹되게 인식하는 지혜나 그릇되게 생각하는 사
고思考가 없으며 항상 인식 작용을 한다.”라고 말했고, 『방광반야경』 역시
“반야를 떠나지 않고 사물의 본성을 인식한다.”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반
야의 작용은 다양하지만 그 본성(이치)은 언제나 일치한다.
[9] ① 是以般若可虛而照, 真諦可亡而知, 萬動可即而靜, 聖應可無而
為. 斯則不知而自知, 不為而自為矣. 復何知哉? 復何為哉?
[9] ① 그리하여 반야는 비록 본성상 공한 것이지만 (대상을) 인식하는
공능이 있고, 진제는 비록 모양은 없지만 반야지혜로 그것을 파악할 수
있다. (반야는) 변화 속에서 불변하는 본체를 인식할 수 있고, 성인은 만물
을 교화하지만 무엇을 한다는 생각이 없이 그런 일을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릇되게 인식하는 지혜가 없이 인식하는 것이며, 하고자 함이 없이 행하
는 것이다. 다시 어떤 지혜가 있단 말인가? 다시 무엇을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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