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1 - 고경 - 2019년 5월호 Vol.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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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만 전력으로 노력해 조금은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높고 뛰어
난 사람의 검증을 거치지 않았기에 감히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불
행히도 구마라집 스님이 입적하신 뒤에는 자문하고 물어볼 곳도 없어졌
기에, 그 점을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폐하의 성스러
운 덕행이 외롭지 않아 홀로 구마라집 스님과 더불어 서로 마음이 통하
고 눈으로 보면 즉시 이해하는 사이가 되어 마음속에 극진한 즐거움이 있
었기에, 능히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퍼트려 말세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인
도하셨습니다. ③ 하루는 우연히 안성후 요숭의 편지를 받아 보았습니다.
안성후 요숭이 ‘열반의 궁극적인 이치’에 대해 묻자, 폐하께서는 “왜 그런
가? 무릇 중생들이 태어나 죽는 등 이리 저리 윤회하는 까닭은 모두 집착
과 욕망 때문이다. 만약 마음에서 욕망을 그치게 한다면 다시는 태어남과
죽음을 겪지 않을 것이다. 이미 태어남과 죽음이 없어지면 정신은 그윽
하고 조용한 곳에 잠겨 허공과 그 덕행이 부합하게 되는데 이를 일러 열
반이라 한다. 이미 열반이라 말했는데 어찌 또 그 사이에 어떤 이름을 용
납하겠는가?”라고 답장하셨습니다. 폐하의 이 말씀은 바로 경론의 뛰어
난 가르침을 체득한 것이자, 형상을 초월한 고상한 담론의 궁극窮極에 도
달한 것입니다. 만약 깨달음이 문수보살과 부합되지 않고 미륵보살과 같
지 않다면, 누가 능히 불교를 널리 펴겠으며 가르침을 보호하겠습니까?
(폐하의 이 말씀은) 움츠렸던 불교를 다시 펴게 하고 침몰했던 성교聖敎를 더
욱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④ (폐하의 글을) 생각하며 빈틈없이
읽고 또 읽으며 잠시라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즐거움과 깨달음이 교차하
고, (즐거워) 쉴 틈 없이 춤을 추었습니다. 어찌 현세의 뛰어난 모범에 그
치겠습니까? 당연히 수많은 세월동안 중생들을 고해에서 열반으로 인도
하는 다리 같은 역할을 할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폐하가 말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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