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9 - 고경 - 2019년 6월호 Vol.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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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포괄하며, 이치는 통괄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통할統轄

            하는 것은 속제일 따름이다. 경전은 “진제란 무엇인가? 열반의 가르침이
            이것이다. 속제란 무엇인가? 있음과 없음의 법칙이 이것이다.”라고 말했

            다. 왜 그런가? 있음은 없음에 대한 있음이며, 없음은 있음에 대한 없음
            이다. 없음이 있는 것을 있음이라 하며, 있음이 없는 것을 없음이라 말한

            다. ② 그러한 즉 있음은 없음에서 태어나며, 없음은 있음에서 태어난다.
            있음을 떠나서는 없음이 없고, 없음을 떠나서는 있음이 없다. 있음과 없

            음이 서로 (의지해) 태어나기에 그것은 오히려 높음과 낮음이 서로 의지하
            는 것과 같다. 높음이 있으면 반드시 낮음이 있고, 낮음이 있으면 반드시

            높음이 있다. 그러한 즉 있음과 없음이 비록 다르나 함께 존재함을 피할
            수 없다. 이것 이유로 언어와 상象이 생기며, 옳고 그름이 나타난다. 어찌

            이것으로 열반의 그윽한 이치를 통괄하고, 열반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③ 그래서 (유명론자 그대의) 반론에서 말하는 있음과 없음은 진실로 있음

            과 없음의 이치이지만 육경 안에 머물 따름이다. 육경 안에 있기에 열반
            이 머무는 곳은 아니며, 그래서 ‘출出’자를 빌려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은 그윽한 길을 걷는 것
            과 같아, 있음과 없음을 분별하는 마음이 완전히 끊어진 곳에 뜻을 의탁

            해, 의미를 얻었으면 말을 잊고, 비유비무의 이치를 체득해야 된다. 어떻
            게 있음과 없음 이외의 다른 어떤 곳에 열반이 있겠는가? ④ 경전이 말하

            는 ‘삼무위’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다. 중생들이 끊임없이 삶과 죽음
            의 길을 왔다 갔다 하며 선과 악 등 여러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다. 업 가

            운데 가장 무거운 것이 바로 ‘있음’에 집착하는 것이다. 있음에 집착하는
            것을 끊는 말로 없음 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그래서 ‘무無’라는 말을 빌

            려 ‘비유非有[있지 않음]’를 밝히고, 비유를 설명하는 것이 결코 없음을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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