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7 - 고경 - 2019년 6월호 Vol.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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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한다: 없다.”라고 말했다. 다만 붓다는 번뇌가 완전히 다 소멸됐고,
성문은 번뇌가 완전히 다 소멸되지 않았을 뿐이다. 가까운 비유를 통해
원대한 열반의 종지를 비교해 보겠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무를 자를 때,
한 자를 자르면 한 자가 잘리고, 한 치를 자르면 한 치가 없어진다. 깎아
서 짧아지는 것은 자[척尺]나 치[촌寸]에 있지 ‘아무 것도 없는 것[무無]’에
있지 않다. 무릇 중생의 종류는 많기도 하지만 인식능력과 근기는 같지
않다. 지혜로 인식함에 깊고 얕음이 있고, 덕을 행함에 두터움과 얇음이
있다. 그래서 함께 피안으로 가지만 오르고 내림이 같지 않다. 피안이 어
찌 다르랴, 차이는 다만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그러한 즉 여러 경전이 비
록 다르게 말해도 그 이치는 서로 틀리지 않는다.
46)
[36][10] 責異 第十. [36][10] 책이 제십.
[37][유명 5] ① 有名曰: 俱出火宅, 則無患一也. 同出生死, 則無爲一
也. 而云“彼岸無異, 異自我耳.” 彼岸則無爲岸也, 我則體無爲者也. 請問我
與無爲, 爲一? 爲異? 若我卽無爲, 無爲亦卽我, 不得言“無爲無異, 異自我
也.” 若我異無爲, 我則非無爲, 無爲自無爲, 我自常有爲. 冥會之致, 又滯
而不通. 然則我與無爲, 一亦無三, 異亦無三. 三乘之名, 何由而生也?
[37][유명 5] 유명이 말 한다: 함께 불난 집에서 나온 것은 근심이 없는
것은 같다. 함께 삶과 죽음의 윤회에서 벗어났다면 ‘무위無爲’인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피안은 차이가 없으나 차이는 다만 자신에게 있다.”라
고 말했다. 피안은 바로 무위의 피안이며, 나[아我]는 무위를 체득한 사람
46) 책이責異에서 책責은 질문하다, 이異는 다름을 말한다. ‘변차 제9’에서 무명이 깨달음은 하나이나, 깨
닫는 사람은 셋이 있다고 하자, 차이가 생기는 이유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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