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6 - 고경 - 2019년 6월호 Vol.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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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모두 소멸됐기에 일을 이뤄도 나의 공적이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가지 않는 곳이 없지만 ‘집착하면서 행하는
           일[유위행有爲行]’은 없고, 공적空寂해 움직임이 없지만 하지 않음도 없다.

           ④ 경전은 “범부처럼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면 일체 사물의 본성을 확연히
           체득한다.”라고 말했다. 진실로 그러하다. 유동 보살은 “옛날 나는 무수

           한 시간 동안 나라의 재산이나 나의 몸과 목숨 등을 사람들에 무수히 베
           풀었다. (그러나) 망상을 품고 보시했기에 진정한 보시가 아니었다. 지금

           집착 없는 마음으로 다섯 송이 꽃을 부처님께 바친 이것이 바로 참 보시
           라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공행 보살이 사물의 본성이 공을 체득하고

           서는 “지금은 공을 인식할 때이지, 열반에 머무를 때가 아니다.”라고 말
           했다. 그러한 즉 마음에 더욱 집착이 없을수록 덕행은 더욱 넓어지며, 하

           루 종일 덕행을 베풀어도 집착 없이 행하는 것과 어긋나지 않는다. ⑤ 그
           래서 『현겁경』은 ‘집착하지 않은 보시’를 칭찬했고, 『성구광명정의경』 역시

           ‘무엇을 한다고 의식하지 않은 행함’을 찬미했다. 『좌선삼매경』은 ‘조건 없
           는 자비’를 부르짖었고, 『사익경』은 ‘그릇되게 집착하는 앎이 없는 지혜’를

           강조했다. 붓다의 가르침은 그윽하게 텅 빔을 강조하는데, 비록 글이 달
           라도 논변하는 내용은 같다. 그런데 어떻게 유위有爲라고 반드시 유위有

           爲이며, 무위無爲라고 반드시 무위無爲이겠는가? 보살은 유위법[세간]에도
           머무르고 무위법[열반]에도 머무르지만, 세간을 떠나지도 않고 열반에 집

           착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남쪽과 북쪽으로 비유하
           는 것은 (이런 이치를) 알고 하는 주장은 결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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