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 - 고경 - 2019년 6월호 Vol.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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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응하며 하나로 된다. 설잠의 시 세계에서도 자연은 대상으로서만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연과 조화로움을 지향하는 이상이다. 이
처럼 탈속하여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설잠의 세외지심世外之心의 선심은
다음의 시에서 한결 깊어진다.
달이 밝아 그림 같은 산사의 밤 월명여화산가야月明如畵山家夜
홀로 앉은 이 마음 맑은 물 같네. 독좌징심만뢰공獨坐澄心萬籟空
누가 세월 밖의 노래를 따라 부르나? 수화무생가일곡誰和無生歌一曲
물소리가 길게 솔바람에 섞이네. 수성장시잡송풍水聲長是雜松風
달 밝은 산사의 맑고 그윽한 공적空寂함이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되고
있다. 텅 빈 고요 속에 외로이 선정에 든 산승의 마음은 물처럼 맑고, 세
월 밖의 노래 소리인 겁외가劫外歌가 들려온다. 그야말로 성률도 없는 무
생곡無生曲이다. 그런데 산승은 세월 밖에서 들려오는 솔바람 소리와 계
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담아내는 무정설법을 듣고 있다. 참으로 자연과의
일체감을 이룬 시정화의詩情畵意가 풍부하고 선지가 잘 내재되어 있는 시
이다. 이와 같이 자연과 하나 되는 탈속한 정신은 깨달음을 지향하는 선
의 세계에서는 ‘평상심이 곧 도’라는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
든 성색과 사물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탈속무애하게 살아가는 설잠
의 삶은 불이선不二禪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백원기 문학평론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교수. 전 국제포교사회 회장, 전 한국동
서비교문학회 부회장. 저서로 『선시의 이해와 마음치유』, 『불교 설화와 마음치유』, 『숲 명상시의 이
해와 마음치유』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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