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6 - 고경 - 2019년 6월호 Vol.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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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인 것같이 말해진다. 특히 와츠지에는 근대불교학으로부터 윤회와

           업에 대한 고찰을 추방했다고 하는 ‘혐의’까지 덧씌우고 있다. 그의 원시
           불교론이 학계를 석권한 것을 계기로, 업보윤회사상을 경시하는 경향이

           완전히 정착했다고 하는 것이다.
             혹은 앞에서도 조금 다루었듯이 12지연기의 지분 배열에 대하여, 우이

           와 와츠지는 그것이 비시간적인 논리적 인과관계를 나타내며, 나아가 상
           의상대相依相待의 관계 가능성도 시야에 넣는 것에 대하여, 기무라는 어디

           까지나 3세에 걸친 계시적 인과를 설한 것이라고 논점을 정리하기도 한
           다. 본서에서는 이러한 예단에 기초한 통설적 논쟁 구도를 모두 뒤엎는

           다. 그러한 오독의 잘못을 근본적으로 없앤 뒤, 논쟁의 당사자들이 의식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진정한 쟁점을 살펴본다. 더욱이 그에 앞서 당사

           자들도 의식하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각각의 논의에 대한 한계도 드
           러낼 것이다. 편견이나 오류의 장막에 의해 진상이 덮여져 온 까닭인지,

           종래 제1차 논쟁 전체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지 않았다.



                                             예를 들면 사이구사 미츠요시三枝
           사이구사 미츠요시의 평가
                                           充悳는 제2차 연기논쟁의 단초가 된

           「중외일보中外日報」의 논설에서, 제1차 논쟁은 “지금에 이르러 잘 생각해
           보면,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평가할 만하다.”라고 잘라 말한다(1978년 4월

           27일자). 그렇지만 『초기불교의 사상』에서는 원전에 기초한 연기설의 정밀
           한 연구의 공적은 “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서, 즉 1920~1940

           년대의 우이 하쿠주 박사에 돌려질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말할 것
           도 없이 이 시기 우이의 연구는 연기논쟁에 의해 촉발되어 자극을 받은 것

           에서 진척된 측면이 크다. 그래서 사이구사도 “거의 동시대의 와츠지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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