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8 - 고경 - 2019년 6월호 Vol.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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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논쟁극이 당사자에게 있어 비극이었는지 희극이었는지는 상관없

           이 제1막의 주역은 우이도 아니고, 와츠지 데츠로도 아니고, 하물며 아카
           누마 치젠도 아닌 바로 기무라였다. 따라서 본서에서는 그의 논고에 대한

           평설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p.79-8] 기무라 다이켄은 1881년 이
           제1차 연기논쟁의 효시
                                     와테岩手현 남이와테군 다키사와滝澤촌 잇

           본키一本木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 지역의 조동종 사찰에서 득도하고,
           조동종대학림(현 고마자와 대학)을 거쳐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인도철학

           과에 들어가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에게 배웠다. 다카쿠스는 오기하
           라 운라이荻原雲來, 와타나베 가이쿄쿠渡辺海旭, 아네자키 마사하루姉崎正

           治 등과 함께 근현대 일본 불교학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대정신수대장
           경」의 편찬과 「남전대장경」의 감수자로도 잘 알려졌다. 기무라는 이 대가

           에게 친히 배우고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다. 이 때 차석이었던 인물이
           후에 논적이 되는 동문의 우이 하쿠주였다. 3년간 영국에 유학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 귀국 후인 1923년 도쿄제국대학 인도철학과 교수가 되었지
           만, 1930년 현직에 있던 상태에서 급서하였다. 향년 48세.

             기무라는 박사학위논문 집필에 있어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가
           쓴 논문의 용지는 가로쓰기의 편지용 종이이었다. 박사논문인 『아비달마

           의 연구』는 유럽 체재 중에 쓴 것으로, 그 논문의 용지가 서구 언어용 편
           지용 종이었지만 거기에 세로쓰기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기무라는 침대

           에 누워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 까닭에 주위의 환경이나 물건
           등에 구애받지 않고 사고하거나 작업하는 타입이었던 것 같다.

             그 기무라가 다이쇼 10년 1921년에 저술한 것이 『원시불교사상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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