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7 - 고경 - 2019년 6월호 Vol.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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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로 또 아카누마 치젠, 기무라 다이켄 이외의 여러 사람들의 공헌도 놓칠

            수 없다.”라고도 부기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의 요동은 대체 무엇인가.
              이런 의문점을 풀어줄 실마리를 찾아보면, 실은 이 『초기불교의 사

            상』의 인용문은 1995년 초판의 제삼문명사 레구루스문고(하권)에서 채용
            한 것이다. 1978년 동양철학연구소에서 발간된 오리지날판의 해당부분

            에는 이 문장이 없다. 동양철학연구소판이 제2차 연기논쟁이 일어난 것
            과 거의 같은 시기에 출판되었다는 사정을 감안하면, 역시 ‘그다지 의미

            가 없다’라는 것이 사이구사의 당시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왜 사
            이구사는 17년 후에 제1차 연기논쟁에 대한 평가를 바꾼 것일까.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사이구사의 제2차 논쟁 시기의 평설의 근저에는 “‘연기’설을 초기불교

            사상의 중심에 두는” 학계의 추세와 일반적 사조에 대한 강열한 초조가
            내면에 숨겨져 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세밀한 문헌학적 입장에

            근거한 사상사적 고찰이 빠져있고, 독단과 편견에 차있는 것으로, 절대
            학설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더욱이 그 초조한 내면에 시대의

            사조에 대한 사이구사의 위기감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제
            4장 이후 상세히 논하기로 한다.

              그렇다하더라도 사이구사의 “연기는 붓다 깨달음의 내용이 아니다.”라
            는 견해는 앞장에서 본 ‘12지 연기는 불교의 심수心髓’라고 하는 알보므레

            스마나사라나 ‘연기를 계속 생각하는 사람이야 말로 붓다(눈뜬 사람)’이라
            고 설하는 마츠모토 시로의 견해와는 너무나도 선명한 대조가 되어, 오늘

            날에도 충분히 자극적이다.
              그 사이구사도 후에 일정의 성과를 인정하게 되는 제1차 연기논쟁은

            기무라 다이켄의 12지연기의 성립을 둘러싼 논문에서 그 시작이 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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