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7 - 고경 - 2019년 7월호 Vol.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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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결코 범서梵書 이래의 윤회와 같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윤
회도 정신적인 윤회감인 것과 동시에 지옥과 삼계설도 석존에
있어서는 정신적 의의를 가진 것은 의심할 바 없다”(「아함경강
화」 제6장 6절 『原始佛敎之硏究』 所收 法藏館)
문장 가운데 니가야는 니카야Nikāya이고, 잡니가야는 상유타 니카야
를 가리킨다. 아카누마는 “윤회에 관한 기사는 석존에게도 있었지만, 이
것은 실재적 의미에 있어서가 아니라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까지 말하
고, 결론을 짓고 있다.(赤沼 前揭書)
같은 저자의 『불교교리지연구』에 수록된 「불교개론」가운데서도 “불타
에 있어서는 그 교설이 일반 민중에 대한 유도의 의미와 그것에 윤회관이
라고 할 만한 일종의 인생관의 심미深味를 의미하는 것으로, 범서 이래의
인도전통의 실재적 객관적 사실로서의 윤회의 신앙이 아닌 것은 명백하
다고 생각한다. 업이 미래의 생을 규정하고, 미래의 생을 만들어 낸다고
하는 과경적過境的 초경험적 신비적인 의미는 불타에게는 없었다고 말하
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문장이 확인 가능하다.(「불교개론」 제1장 4성제 『佛敎敎
理之硏究』 法藏館)
그러면 와츠지는 어떠
와츠지는 윤회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한가? 정말로 원시불교
는 ‘삼세에 걸친 윤회의 양상’을 적극적으로 설하지는 않았다라고 주장하
고 있는 것일까? 『원시불교의 실천철학』에는 앞에서 본 스에키 후미히코
와 같이 와츠지를 윤회부정론자로서 고정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놓
치기 쉬운 구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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