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0 - 고경 - 2019년 7월호 Vol.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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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원동력으로서 나아가는 창조적 진화 그 자체이다’ 여기에

                서 우리들은 살려고 하는 의지 자신이 창조적인 것에 따라서
                그 의지에 새겨진 ‘성격’도 또 창조적이며, 변화적이라는 주장

                을 발견한다.”(和辻, 前揭書)



             하지만 이것은 기무라의 주장으로, 초기불교의 윤회관, 업론은 아니
           다. 초기불교의 그것은 앞서 거론했듯이, 악업을 쌓으면 사후 지옥에 태

           어나고, 선업을 쌓으면 사후 천에 태어나는 것과 같이 극히 심플한 것이
           다. 와츠지는 기무라의 일탈逸脫을 비판한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윤회설이 될 수 없는 윤회설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불가해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앞의 해석에서 ‘붓다에 따르면’이라는 말이 반복되어짐에도 불

                구하고, 아함의 경전 가운데 그 증거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
                다. 경전에 나타난 윤회사상은 결코 앞에서와 같이 난해한 것

                이 아니다.”(방선 인용자, 和辻, 前揭書)



             와츠지는 기무라와 같이 제4차원(‘the fourth dimension’) 등과 같은 말을
           사용해 윤회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윤회는 범부의 소

           박한 시좌視座, ‘자연적 입장’에 있어서는 ‘있는’ 것이고, 지옥도 천도 ‘아가
           현실적인 것과 같이 현실적이며, 아가 무인 것과 같이 무’인 것이다. 기무

           라와 와츠지 어느 쪽이 전통적인 업보윤회설에 따르고 있는 것인가? 또
           「실천철학」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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