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8 - 고경 - 2019년 8월호 Vol.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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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력의 법칙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만유인력은 만물에 작용하지 않았다
는 것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여래가 출현하기 이전에도
무명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태고적부터 무명에서 생기는 갖가지 고가
사람들 사이에 실제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불타 출현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당연히 붓다의 교설을 알
수도 없었고, 단적으로 말해 무지하였던 것이다. 붓다가 세상에 출현하여
비로소 무명으로부터 노사까지의 연기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방
법으로 연기지의 하나하나를 소멸시키는 방법이 발견된 것이다.
흠 잡을 데 없는 이치라고 생각되지만, 기무라는 이것으로 무엇을 반
증하고 싶었던 것일까.
신앙론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만약 붓다가 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연기의 이법은 인류에게 알려지지 않고, 우리들은 영
원히 무명의 삶에 속박될 수밖에 없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불교도이다. 이
위기적 의식이 불교인의 신앙에 기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연
기설은 항상적이며 영원한 진리일 수 없다. 그것 자체 무상하고 변화와
소멸의 위기를 잉태한 ‘진리’인 것이다.
기무라의 이러한 빗나간 비판에 비하면, 종교적 텍스트에 있을 수 있
는 일종의 순환논법에 빠져있다고 논란하는 쪽이 오히려 이치에 부합한
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 불타의 근본사상이 불타의 근본사상에 의해 대표되는 법의 진상
眞相이란 의미로, 따라서 무명이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라고
한다면, 물론 이것은 이전보다도 깊고 올바른 견해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왜 우리들 범부는 법의 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본래 이해할
수 없게 하는 근본동력이 무엇인가를 논구하지 않으면 정리될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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