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4 - 고경 - 2019년 8월호 Vol.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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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식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인식은 명의 입장에서 가능한 까닭에 인

           식되어졌을 때는 이미 더 이상 무명이 아니다.”(和辻 前揭書)
             아무래도 궤변과 같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화츠지의 행

           론은 가끔씩 단락적으로 이해되는 결함이 나타나며, 이 설명도 그 전형
           이다. 그는 “명이란 무명을 찾아내는 것인 동시에 무명을 소멸하는 것이

           다.”라고 명쾌하게 쓰고 있다.(「제2편 제1장 제1절 세속제와 제일의제」  『佛敎倫理
           思想史』 『和辻哲郞全集 第19卷』所收, 岩波書店)

             ‘무명을 찾아내는’ 것과 ‘무명을 소멸하는’ 것은 확실히 ‘명’의 속성이지
           만, 반드시 ‘동시에’ 일어나는 사상은 아니다. ‘찾아내는’ 것은 시작에 지

           나지 않고, 불교의 용어로 말하면, ‘발심發心’에 해당하는 경우도 있다. 거
           기에서 수행이 시작되어 ‘그것이 실로 무명에 다름 아닌 것’을 심신 상

           철저하게 정착시킴으로서 비로소 ‘무명을 소멸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의 예시에 빗대어 보면, 빨강이라는 색이 적극적인 실체가 아니라 즉 ‘자

           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색 즉 파랑색, 노랑색 등과의 차이에 있
           어서 존재한다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빨강의 자성, ‘빨강색은 있

           다’라는 느낌이 곧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와츠지는 그 중요성을 알
           고 있었기 때문에 나가르주나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반야는 세속제에 있어서 ‘법’을 찾아내지만, 그러나 그것만으

                로 법을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열반(멸)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
                해서는 법의 인식(반야)이 극한을 초월하는 것(바라밀)이 요구된

                다.”(和辻 前揭書)



             하지만 와츠지는 ‘찾아내는’ 것과 ‘소멸하는’ 것 사이의 간격에 대해 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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