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5 - 고경 - 2019년 8월호 Vol.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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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불교관은 주지주의적이고, 논리편중이며,
수행을 등한히 하고, 체감을 무시한다고 하는 등의 오해가 지금도 따라다니
고 있다. 마츠오 노부아키松尾宣昭는, 와츠지가 “아가 있다고 헤아리는 범부
에게만 고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와츠지가 충분히 말하고 있지 않
는 것은 앞의 ‘헤아리는’ 것의 성격, 그것의 뿌리 깊음이다.”라고 비판하고
있으며(「‘윤회전생’고(1)」 『龍谷大學論集』 第469号), 이것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156-3] 하지만 그것이 ‘충분한지’ 어떤지
범부의 아, 범부의 고
는 차치하고, 와츠지가 그 ‘뿌리깊음’을 문제
로서 의식하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어떤 범부가 교리연찬을 거듭하
고, 수행을 쌓고, 무지를 완전히 불식시켰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범부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와 무지란 근대적인 지성과 지식과는 전
혀 다르다. 따라서 와츠지는 『불교윤리사상사』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범부의 입장에서는 행의 자기 한정이 현상의 세계를 전개하
며, 부처의 입장에서는 행이 그 자신에게 돌아가는 즉 부정
Negation으로서 멸의 세계, 무위의 세계를 전개한다.”, “이 부정
의 이해는 그것을 체득體得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으로,
여기에 불교철학이 특히 실천철학으로서 특징 지워지는 이유가
존재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시도하고 있는 philosophieren은,
불교의 용어를 빌린다면, 지혜의 입장에 서는 것에 다름 아니지
만, 그러나 그 지혜의 입장이 곧바로 멸이 되어 실현되기 위해
서는 단순히 인식이 아니라 체현體現되지 않으면 안 된다.”(「제1
편 제2장 연기설」 『和辻哲郞全集 第19卷』所收, 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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