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6 - 고경 - 2019년 8월호 Vol.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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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속의 philosophieren필로조피렌이라는 독일어는 ‘철학적으로 사유하
다’ 정도의 의미이다. 와츠지는 여기에서 철학적 사색에 근거한 인식으로
는 멸의 세계를 통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지혜의 입장이 멸이
되어 실현되는 것은 단순한 인식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체득’ ‘체현’을 필
수로 한다. 그는 그렇게 단정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원시불교에 있어서
연기관을 먼저 인간에 있어 인식의 고정적 지평으로 돌려서 해석하려고
한다.”(山折哲雄 「말라빠진 불타」 『近代日本人의 宗敎意識』所收, 岩波現代文庫)는 등
으로, 와츠지의 연기론을 근대의 논리주의나 주지주의로 과도하게 치우
쳐 이해하려는 논평은 와츠지의 의도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또 종교학자 게타 마사코氣多雅子에 의한 “와츠지 사고방식의 근본
적 문제점은 붓다의 지(지혜)에 있어 선정의 의의를 인정하지 않는데 있
다.”든가 “수행의 중요성을 등한시했다”라는 논평도 올바르다 고는 할 수
없다.(氣多 「불교를 사상으로서 추구하는 것 ― 와츠지 테츠로의 원시불교연구를 중심
으로」 實存思想協會編, 『思想としての佛敎 實存思想論集 XXVI』, 理想社)
와츠지는 앞서 인용한 『불교윤리사상사』에서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한다’라고 알려졌을 때, 무명은 곧바
로 지양될 것인가. 관념적으로는 그렇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무아, 연기를 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이 진정 알려져 파착(把捉
begreifen 구체적인 실현)되는 즉 체현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가
령 ‘아’가 본질이 없는 것이라고 진정 알려졌다고 한다면, 이
기주의의 입장은 지양되겠지만, 무아의 고찰은 반드시 아집의
탈각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단지 추상적으로 무아를 생각하
며, 진실로는 아를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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