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9 - 고경 - 2019년 9월호 Vol.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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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은 1978년 4월부터 1980년 3월까지 거의 만 2년에 걸쳐 전체 49

            개의 논쟁문이 게재되었다. 숫자만 보면 논의가 열정적으로 이어진 듯하
            지만, 신문의 게재로 1회분의 지폭이 엄격히 제한되어 총량은 그다지 많

            지 않다.



              이하 <중외일보> 지상의 논고를 가리키는 경우, 예를들어 사이구사의
            1978년 4월27일자 최초의 기사라고 하면, (三枝<1>[상])이라 약기한다. 이

            일련의 기사 즉 [상][중][하] 모두를 나타내는 경우에는 (三枝<1>)로 약기한
            다. 동일하게 후나하시의 1979년 7월3일 게재문이라면 (舟橋<6>[2]), 미야

            지의 1980년 2월7일자-동년 2월26일자까지의 일련의 9편의 논고 전체
            라면 (宮地<9>)이다. 표제 등은 적절히 필요에 따라 붙인다.



              이 논쟁에 앞서 몇가지 책이나 논문을 ‘전사前史’로서 참조할 필요가 있

            다. 또 <중외일보>에서의 논쟁이 끝난 뒤, 당사자에 의해 쓰여진 문헌도
            적당히 참조한다. 이것들은 논의를 전개하는 중에 소개하기로 한다.



              사이구사가 쏜 첫 번째 화살

              [p.177-12] 먼저 본 논쟁의 효시嚆矢가 된 사이구사가 쏜 첫 화살을 보
            기로 한다(三枝<1>). 바로 눈에 띄는 것이 「12인연설의 독단」이라는 큰 표

            제어이다. 더욱이 그 [상]의 지면에는, “석존의 깨달음을 ‘연기’라고 설하
            는 것에 강하게 반론한다”라는 중간의 표제어가 나타난다. 간단히 말해

            도전적인 지면구성이다.
              이미 본서 제1장에서 보았듯이 사이구사는 “석존=고타마 붓다는 보리

            수 아래에서 12지연기(12인연)의 이법理法을 깨달았다”라는 설을 전면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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