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5 - 고경 - 2019년 9월호 Vol.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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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난타가 『화엄경』을 번역할 때도 참여하는 등 수많은 역경불사에 큰 족
적을 남겼다.
원측 스님은 현장 스님이 귀국하여 경전을 번역하고 유식학을 강의하
자 그의 문하로 들어가 규기 스님과 동문수학하며 현장 스님을 사사師事
하게 된다. 이로써 원측 스님은 중국의 3대 유식학파 중에 두 개 학파의
교리를 섭렵한다. 이와 같은 폭넓은 학식을 토대로 『성유식론소』, 『해심밀
경소』 등 유식과 관련한 여러 편의 탁월한 논소를 남겼다.
하지만 자은사에 머물며 법상종의 중심으로 활동했던 규기 스님과 달
리 원측 스님은 서명사西明寺에 머물렀고, 유식학에 대한 견해 역시 법상
종의 주류 학설과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원측 스님은 구유식으로 불리
는 섭론종의 사상과 신유식으로 불리는 현장 스님의 사상을 모두 섭렵한
이력을 갖고 있다.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규기 스님보다 폭넓은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원측 스님은 신·구 유식의 장단점을 융합하려는 경향을 보
여주었다. 섭론종 계열의 학설을 수용했지만 진제의 9식설에 대해 의문
을 제기하며 신유식의 8식설을 받아들였다. 반면 자은종에서 강조하던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하며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원측의 이런 견해는 모두 옳은 판단이었다는
것이 후대의 평가다.
학설에 대한 차이와 반론은 교학발전에 원동력이 되지만 원측 스님에
게는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다. 호법의 입장을 중시하는 규기 스님을 비
롯한 자은학파 문인들은 원측 스님을 이단이라고 비방하며 공격했다. 게
다가 신라출신이었기 때문에 비록 중국 제자들을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원측 스님의 법은 오래 전승되지 못하고 단명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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