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1 - 고경 - 2019년 12월호 Vol.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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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수행자의 지극히 고요한 정신세계가 경물과 조화를 이루어 잘 표현

            되어 있다. 물고기, 달, 새, 구름 등 자연물을 두루 원용하여 확 트인 선
            열禪悅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산자락이 속진俗塵을 막아주고, 계곡 물소

            리는 바깥소리를 잠재우며, 보름밤이면 둥근달이 계곡물에 부서지는 소
            리를 냈을 산당山堂에서 선정에 드는 선사의 모습이 선명히 읽혀진다. ‘달

            을 읽는 물고기 소리를 고요히 듣는’ 화자는 능히 하늘을 이야기하는 새
            와 웃으며 마주할 수 있다니, 가히 성성적적한 선사의 선심의 시심화의

            압권이다.
              김천 청암사 수도암은 길지 중의 길지라 할 수 있다. 무흘구곡 끝자락,

            도선국사가 이곳에 터를 잡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7일 동안 춤을 추었
            다고 하니 가히 짐작이 된다. 해인사 조실로 있던 경허가 수도암에 주석

            하고 있을 때, 한암 중원(1876-1951)이 찾아와 경허의 『금강경』 강의를 듣
            고 심안이 환하게 열렸다. 그런데 겨울 한철을 함께 지낸 한암이 떠나려

            하자 경허는 “슬프다.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
            랴.”며 이별의 아쉬움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대 멀리 떠나보내는 내 마음                  爲君賦遠遊

                한없이 눈물이 흐르누나                      使我涕先流
                인생은 한 백년 나그네                      百歲如逆旅

                어디에 묻힐지 아득하구나                      何方竟首邱


              경허는 누구에게도 집착하는 법이 없었다. 말년 홀연히 삼수갑산에 머
            리를 기르고 숨어든 그를 애제자 수월이 찾아왔을 때도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는 말 한마디로 돌려보낸 경허였다. 그런 경허가 한암에게만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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