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0 - 고경 - 2020년 2월호 Vol.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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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본질은 공하다. 일체법이란 유위와 무위를 통칭하는 개념인데, 규
기는 유위는 ‘허망한 분별[妄分別]’로 무위는 ‘공성空性’으로 정의했다. 모든
존재는 허망분별이라는 유위와 공성이라는 무위의 특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처럼 있음과 없음이라는 특성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음으로 모든
존재는 그 자체가 비유비무非有非無라는 중도적 특성을 갖게 된다.
있음과 없음 그리고 함께 있음이라는 이런 논리는 비유비무非有非無와
역유역무亦有亦無라는 천태와 화엄의 중도론과 궤를 같이한다. 유와 무는
대립적 특성이지만 하나의 존재 안에 이 두 성질은 공존하고 있다. 허망
하게 분별 되는 개별적 존재들 속에는 진공眞空으로써 이법이 있고, 진공
이기 때문에 자기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 인연을 따라 자유롭게 드러날 수
있다. 이처럼 허망하게 분별 된 존재들의 속성은 진공이고, 진공은 또 허
망하게 분별 되는 존재들로 드러난다. 공이라는 본질과 허망하게 분별 되
는 거짓 존재들은 서로 대립적이지만 서로 소통하고 있다. 자신을 고집하
지 않는 진공이기 때문에 존재들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묘유妙有로 드
러난다.
이렇게 모든 존재의 실상이 유有이면서 동시에 무無이므로 존재는 그
자체로 중도의 원리를 체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눈 앞에 펼쳐
진 모든 존재는 그대로 진여로 긍정된다. 규기는 ‘진여는 공성空性이어서
공에 의지하여 나타난다[眞如是空性 依空所顯]’고 했다. 진여의 성품은 실체
가 없는 공성을 띠고 있다. 진여는 실체 없는 공에 의지하여 자신을 드러
낸다. 한 송이 꽃은 무수한 관계에 의지해 피어난다. 존재가 갖는 그런 이
치를 화엄종의 법장은 ‘탁사현법託事顯法’이라고 표현했다. 본질로서 진여
는 공한 사물에 의탁하여 드러나기 때문이다.
유식학의 기본은 만법유식萬法唯識이고 유식무경唯識無境이다. 삼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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