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8 - 고경 - 2020년 3월호 Vol.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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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검토한 뒤에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상시

           론지’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사가들은 사료의 말미에 ‘의왈議曰’이라
           해서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혹은 ‘강론하다’의 의미로 사료 분석과 기록

           평가를 덧붙이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는 문헌에 대한 서양인들의 과학적
           합리적 분석적 태도와 방법론과 다르지 않다. 동양인들도 사료에 대한 객

           관적 태도를 엄밀하게 견지해 왔던 것이다.
             이를테면 일연은 『삼국유사』 「흥법」편 ‘아도기라’ 조목에서 ‘상시론지’를

           통하여 “양나라와 당나라의 두 『고승전』과 『삼국본사』에 모두 고구려와 백
           제의 두 나라 불교 시초가 진晋나라 말년인 태원 연간(376-395)으로 기재

           되었으니 순도와 아도 두 법사가 소수림왕 갑술년(374)에 고구려로 온 것
           은 분명하니 이것은 틀리지 않았다. 만일 비처왕 때에 처음 아도가 신라

           에 왔다면, 이는 아도가 고구려에 100여 년 머물다 온 것이 된다. 비록 위
           대한 성인으로서 행동이란 나타나고 없어지는 것이 평범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또한 신라에서 불교를 받든 것
           이 이렇게 늦지도 않았을 것이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 “만일 미추왕 때에 있었다 하면 오히려 순도가 고구려에 왔던 갑술
           년보다 100여 년을 앞서게 되니, 그때 신라는 아직 문물제도가 없었고,

           나라 이름도 정하지 못했는데, 어느 겨를에 아도가 와서 부처 받들기를
           청할 수 있었겠는가? 또 고구려에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뛰어넘어 신라

           에 왔다는 것도 합당치 못하다”고 하였다. “설사 잠깐 일었다가 스러졌다
           하더라도 어찌 중간에 그렇게 적막하게 몰라, 향의 이름마저 몰랐다 할

           수 있는가? 한쪽에는 어찌 그리 늦고 또 한쪽은 어찌 그리 빠르게 기록되
           었는가? 생각하건대 불교가 동방으로 전파되어 온 형세를 살펴보면 반드

           시 고구려와 백제에서 시작되어 신라에서 그쳤을 것이다. 눌지왕은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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