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0 - 고경 - 2020년 4월호 Vol.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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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헌은 혜거선사의 귀국 연유를 상
세히 밝히고 있는데, 그를 흠모하던 왕이
사신을 보내 돌아오기를 청했다는 점
이다. 과연 그를 흠모했던 국왕은
누구일까. 그 국왕은 광종이라 여
겨진다. 광종은 법안종을 적극적으
로 수용한 왕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청주 사뇌사지 맷돌, 국립 청주박물관.
그러므로 윗글에 “고려 국왕이 사신을 파
견”했다는 국왕은 광종이라는 사실은 분
명한데,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이뿐만이 아니다. 광종이 영면영수(904-
975)의 『종경록』을 읽고 감동하여, 고려의 승려 30여 명을 파견하여 법안
종을 배우게 했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된 정보이다. 따라서 그가 선종을
정비하면서 법안종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배경은 이처럼 자명한 것이다.
한편 광종은 고려의 통치 기반을 단단히 구축한 것은 왕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는 중앙집권화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과거제를 시행하였고
국가 제도를 정비했다. 그리고 불교 교단을 정비, 불교를 국가 운영체계
에 공식적으로 포함했다. 그러므로 법안종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광종
시기에는 왕실에서 주관한 불교 행사에 차를 올리는 의례가 더욱 강화되
었을 것이다. 그러니 왕이 친히 차를 가는 행위 자체가 공덕을 상징하는
행위로 규정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법안종과 차 문화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법안종은 오월 지역을 거점으로 일어난 종파
이다. 오월은 바로 파촉巴蜀 지역으로, 중국 차 문화의 발생지이다. 그러
므로 오월을 거점으로 교화했던 법안종은 수행에 필요한 차를 수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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