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1 - 고경 - 2020년 6월호 Vol.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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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젊어서는 불경 연구에 심

            취하였고, 말년에는 남경 금릉각경처를 설립하고
            불교 경전 간행에 여생을 바쳤다. 양문회가 간행한

            불교 경전들은 1920년대 『대승기신론』 논쟁이 일어
            난 사회적 배경이 되었고, 이후 1950년대까지 그의
                                                           사진 1. 양문회.
            영향력이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승기신론』을 만나다



              양문회가 불교에 전념하게 된 계기를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안휘성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친은 증국번, 이홍장과

            같은 해 진사에 합격하였던 경력으로 당시의 고위층과 밀접한 친분을 맺
            고 있던 유학자였다. 그래서 양문회 본인이 원한다면 충분히 높은 관직을

            얻을 수 있었으나, 그는 관직에 별로 뜻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태평천
            국의 난이 일어나자 양문회는 증국번을 도왔고, 이러한 연고로 후에 외교

            관으로 유럽을 순방하게 되었다. 이처럼 철저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양문회가 불교에 귀의하게 되는 계기는 아주 흥미롭다.

              그는 부모가 정해준 약혼녀- 어려서 천연두에 걸려서 다소 미색이 떨
            어지는 여인-와 결혼하였지만, 태평천국의 난(1851년)으로 항주에 피난한

            시점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둘째 부인으로
            삼으려는 그의 시도가 집안의 반대로 무산된 이후, 양문회는 모든 일에 의

            욕을 잃었고 죽고 싶었다. 그는 매일 서호라는 호숫가를 산책하며 마음을
            달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호숫가에 있는 한 서점에서 우연히 『대

            승기신론』 복사본을 발견하고 깊은 인상을 받아, 자신이 비록 유학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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