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2 - 고경 - 2020년 6월호 Vol.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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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서 태어났지만 불교 연구에 몰두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에피소드가 전

           해진다. 이는 근대 불교사상가가 될 한 젊은이와 『대승기신론』의 운명적인
           만남이라 할 수 있다.




             난조분유와 교유


             불교에 대한 오랜 무관심과 불교에 적대적이었던 태평천국의 난으로

           사찰이 파괴되는 등 혼란한 상황에서, 양문회는 불교 전적을 구하기 위
           해 애썼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1866년 남경에 금릉각경처를 창립하고

           불경 간행에 힘썼다. 1878년부터 청조의 외교관 자격으로 런던과 파리 등
           유럽을 순방하였고, 런던에서 막스 뮐러 교수를 만났다. 그를 통해 중국 대

           장경의 목록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학자 난조분유(南條文雄, 1849-1927)를 알
           게 되었다. 그는 난조에게 모아놓은 불교 전적들을 일본에서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고, 그 결과 중국 대장경 목록에 들어있지 않은 수백 권의 불교
           전적들, 특히 당(唐)대 고덕의 주소들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중에 당대唐代

           법장(法藏, 634-712)이 편찬한 『대승기신론의기』, 『별기』가 있었고, 이로 인해
           양문회는 『대승기신론』에 대해 새롭게 이해할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수집된 문헌들 속에는 현장(玄奘, 602-664)의 『성유식론』에 대한 규기(窺
           基, 632-682)의 주석인 『성유식론술기』가 포함되어 있었고, 또 둔륜遁倫의

           『유가사지론기』, 규기窺基의 『법원의림장』, 그리고 불교논리학에 대한 진
           나(陳那Dignāga, 480-540)의 저서와 규기의 『인명입정리론서』가 있었다. 이

           들 문헌들은 중국에서는 오래도록 일실되었던 것으로서, 중국인들이 500
           년 동안 보지 못했던 문헌들이 일본에서 중국으로 역수입되는 계기가 되

           었다. 이런 문헌들로 인해 유식 불교에 대한 연구도 새롭게 일어나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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