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8 - 고경 - 2020년 6월호 Vol.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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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로, 그는 샤쿠 소엔의 재가在家제자

           로 종교회의에 통역자로 참석하였다. 이들 일본불교 대표들의 발표는 비록
           각 종파를 대표해 발표를 임한 것이지만, 대승불교의 세계를 서양의 세계

           와 세계 각 종교의 지도자들에게 널리 알린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재가자로 참석하여 발표에 임한 히라이 긴자는 일본과 미국

           의 불평등조약이 기독교 우위의 문명국의 입장에서 동양을 야만적으로 경
           시하는 입장에 서있는 것이라 비판하고, 이러한 경시의 태도는 진리의 입

           장에서는 오히려 비종교적인 모습이라고 기독교를 비판하였다고 한다. 그
           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약의 불평등성은 일본이 ‘비문명국’으로 분류되는 것으로부

                터 생긴 일이다. 당시의 국무장관은 그 불평등성을 인정하면서
                도 ‘터키나 페르샤 등 모든 야만적인 인종’과 같은 ‘오리엔트의

                나라들과의 조약에서 명기할 때는’ 필요한 사항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오리엔트’와 ‘야만적인’의 의미는 교환이 가능한 언어

                이다. 조약체결 당시 타운젠트 해리스 등 일본을 아는 자들에
                게 있어서는 불평등조약의 문제점은 분명했다. 1893년이 되어

                도 일본은 아직도 ‘오리엔탈’과 ‘야만적인’ 상황 속에 있다.”[필자
                주 : 미일통상조약은 1858년에 조인되어 1899년까지 발효되었다.]



             히라이는 일본의 불교와 종교 전체를 대변하는 입장에서 서양의 기독교

           적 우월감을 간파해 종교적 본질에서 그러한 우월적 태도를 비판하여 상당
           히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히라이의 발표는 언론을 통해 종교회의

           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물론 서구나 유럽 사회에 기독교에 대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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