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7 - 고경 - 2020년 7월호 Vol.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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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이 있는 그 자리에 바로 생성이 존재한다. 마치 낙엽이 떨어진 자리에
            서 새순이 돋아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세계에서는 소멸이 없이 생성이 있
            는 경우가 없다. 다만, 낙엽이 썩는 것을 보지 않고 새순이 나는 것만을 보

            기 때문에, 그리고 성간물질이 소멸하는 것을 보지 않고 별이 생성하는 것

            만을 보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생겨났다고 착각할 뿐이다.
              이렇듯 우리가 어떤 것을 보면서 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다만 생生의
            측면만을 보기 때문이요, 우리가 어떤 것을 보면서 멸이라고 하는 것은 우

            리가 다만 멸滅의 측면만을 보기 때문이다. 어느 한 면만을 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생이라거나 멸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생이나 멸이라고 부
            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이나 멸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관점
            일 뿐이다. 연기하는 과정 전체를 다 본다면 생은 멸이라야 비로소 가능

            한 것이고 멸은 생이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므로 생은 멸을 안고 있고

            멸은 생을 안고 있다. 멸과 생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소멸
            이면 곧 생성이고 생성이면 곧 소멸이어서 불생불멸의 중도가 된다.
              그러므로 생이 따로 있고 멸이 따로 있으며 이 둘을 더하여 불생불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생의 바로 그 자리가 불생불멸이고 멸의 바로 그 자리

            가 불생불멸이다. 생해도 불생불멸이고 멸해도 불생불멸이니, 생의 그 자리
            가 바로 중도이고 멸의 그 자리가 바로 중도이다. 수학에서는 1 + (-1) = 0
            이어서 (1)에 (-1)을 더해야 비로소 0이 되지만, 생과 멸을 더하여 불생불멸

            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 불생불멸의 중도는 이러한 계산과는 다르다. 1에다
            (-1)을 더하여 0이 되는 것이 아니라, 1이 곧 0이요, -1이 또한 곧 0이다. 1

            도 연기공이고 불생불멸이며, (-1)도 또한 연기공이고 불생불멸이기 때문이
            다. 연기하므로 오직 공인데, 무엇이 생하고 무엇이 멸하겠는가? 연기와 유

            무·생멸의 중도를 설하는 『능가경』 「무상품」을 살펴보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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