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 - 고경 - 2020년 8월호 Vol.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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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 표현되기도 한다. 따라서 중도란 곧 마음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중도
를 깨쳤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자리’, ‘근본자성’을 바로 보았다는 말로서
이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따라서 견성이란 근본 마음자리를 확연히 깨쳐,
즉 중도의 이치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요즘 항간
에서 견성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사례들을 살펴보면 견성의 본뜻과 거리가
먼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자면 유럽을 여행하다가 일본인이 운영하는 선방을 견학하고 온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많은 유럽인들이 선방에 모여 참
선을 하고 있는데, 찬찬히 둘러보니 그 좌석배치가 견성한 사람의 좌석과
견성하지 못한 사람의 좌석으로 나눠져 있더라고 한다. 게다가 견성한 사
람이 앉는 좌석에 견성하지 못한 쪽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더라
는 것이다. 견성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이 하도 신기해 “당신 정말로 견
성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
서 도대체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인가받았냐고 되물었더니, 자기는 스승으
로부터 점검을 받고 ‘무無’자字 화두話頭를 참구해도 된다고 허락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지금 “무!” 할 줄 안다고 대답하더란다. 그러니 결국
그들이 말하는 견성한 사람과 견성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무!” 할 줄 아
는 사람과 “무!” 할 줄 모르는 사람의 차이였던 것이다. 이는 일본사람들
이 가르치고 있는 선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
들이 현재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전국 선방에 견성 못한 사람이 도리어 드문 것이 현재 한국불교의 실정
이고, 이 자리에 앉은 선방 수좌들 역시 나름대로 견성에 대한 견해를 한
가지씩은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흔히 참선하다가 기특한 소견이 생기면
그것을 두고 ‘견성했다’거나 ‘한 소식 했다’고들 하는데 정작 만나서 살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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