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 - 고경 - 2020년 8월호 Vol.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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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견성하지 못한 사람하고 똑같다. 과연 무엇을 깨쳤나 점검해 보면 제 홀
           로 망상에 휩싸여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떠드는 것에 불과하다. 견성에 대
           한 그릇된 견해와 망설은 자신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선종의 종

           지宗旨를 흐리고 정맥正脈을 끊는 심각한 병폐이다. 『선문정로』를 편찬하면

           서 첫머리에 ‘견성이 곧 성불’임을 밝힌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견성하면 곧 부처임은 선종의 명백한 종지이다. “견성해서 부지런히 갈
           고닦아 부처가 된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부산에서 서울 가는 일

           로 비유를 들자면 저 삼랑진쯤이 견성이고, 거기서 길을 바로 들어 부지런

           히 달려 서울에 도착하는 것을 성불로 생각한다. “견성한 뒤 닦아서 부처
           가 된다.”는 것은 견성의 내용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서울 남대문 안에 두
           발을 들이고 나서야 견성이지 그 전에는 견성이 아니다. 견성하면 그대로

           부처지, 닦아서 부처된다고 하는 이는 제대로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다.

             『종경록』 에서 “자성을 보면 당장에 무심경이 된다.”고 하였는데 제6식
                    14)
           만 제거되어서는 망심이라 하지 무심경이라 하지 않는다. 무심이란 제6식
           의 추중망상麤重妄想 뿐 아니라 제8 아뢰야식 의 미세망상微細妄想까지,
                                                   16)
                            15)
           즉 3세6추가 완전히 제거된 것을 일컫는 말이다. 부처님 팔만대장경은 중

           생들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약방문이다. 환자야 약방문이 필요하지만 병의
           근본뿌리까지 완전히 제거한 이에게 무슨 약방문이 필요한가? 진여자성을
           확연히 깨달아 무심경이 된 사람, 즉 성불한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도 어

           떤 수행도 필요하지 않다. 부처님의 팔만대장경도 조사의 1,700공안도 모

           두 필요 없는 그런 사람이 견성한 사람이다. 역으로 가르침이 필요하고 수
           행이 필요하다면 그는 구경무심을 체득하지 못한 사람이고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다. 제8 아뢰야식의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제거되어 구경의 묘각을

           성취한 것이 견성이지 그러기 전에는 견성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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