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9 - 고경 - 2020년 10월호 Vol.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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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고 있었다. 특히 천재 현장(玄奘, 602-664) 법사는 고승의 평판에도 아
랑곳하지 않고 629년 목숨을 건 천국구법행天竺求法行에 나서 10여 년간 인
도의 대덕, 철인들에게 불교철학을 공부하였다. 645년 귀국하여 장안 대자
은사大慈恩寺에서 657부의 불경을 본격적으로 번역하면서 불교철학의 새
지평을 열어 나가고 있었다.
이미 신라 왕손 원측(圓測, 613-696)도 3세에 출가하여 15세에 당나라로
가서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중국어 등 여러 언어를 구사하면서 유식학,
소승 대승 경론을 종횡무진 넘나들고 현장의 역경불사에도 함께하여 천하
에 뛰어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여러 경을 번역하는 중심에 있었을 뿐 아
니라 695년 지금의 화전和田인 우전국于闐國에서 온 실차난타(實叉難陀,
Śiksānanda, 652-710)가 『화엄경』을 번역할 때도 함께 하였다. 19세에 황복
사皇福寺로 출가한 의상도 661년 38세의 나이로 드디어 당나라로 건너갔다.
화엄학을 정립한 당대 화엄 2조 지엄(智儼, 602-668) 화상 문하에서 공부한
후 스승의 인증印證을 받고 지엄 화상의 대를 이을 만큼 명성을 떨쳤다. 그
러나 그는 당이 신라를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리고자 문무왕 11년 671
년에 급히 귀국한 뒤 신라에서 화엄이론을 펼쳐나갔다. 지엄을 이은 3조
현수(賢首, 643-712) 화상도 의상 대사와 계속 지적 교유를 이어갔다.
의상 대사는 귀국한 해 황복사에 머물던 중 계시를 얻어 동해안 관음
굴을 찾아 지금의 의상대 절벽 위에서 관음 보살을 친견하는 기도를 올리
고 드디어 관음 보살의 현현을 보게 되었다. 그 가르침에 따라 관음굴 위
에 홍련암을 짓고 오봉산 기슭에 낙산사를 지었다. 그때 의상 대사가 기도
하면서 올린 발원문은 실로 불교의 정수를 정확히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
라 구도자로서 간절함이 절절이 넘치는 천하의 명문이다. 사실 이 발원문
만 제대로 이해해도 많은 경을 공부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런데 논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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