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1 - 고경 - 2020년 10월호 Vol.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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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계부터 이방원까지 내적으로는 불교를 존중하여 왕실에서는 낙산사를
중히 여겼다. 그러다가 세조가 친히 낙산사를 방문하고 대대적으로 중건하
도록 하여 학열 화상이 총책임을 맡아 중창하고 홍예문, 칠층석탑, 원통보
전 담장 등을 조성하였고, 아들 예종도 동종을 조성하고, 성종도 교지를
내려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고 요역을 감면시키는 등 각종 혜택을 베풀었다.
불교 측에서 보면, 유교 국가 조선에서 세조가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
하고 불경을 간행하고 낙산사를 대대적으로 지원한 것은 큰 도움이 되었
지만, 조카인 단종을 제거하여 부당하게 권력을 찬탈한 자신의 정통성의
허약함이나 아니면 피의 업보를 씻어내려는 콤플렉스에서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조선의 역사에서 보면, 세조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거치며,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우려한 의지는 퇴색되고 국가 권력의 사유화가 진
행되기 시작한다. 권력을 찬탈하는 불의한 살육과 이러한 왕위찬탈에 부
역한 공신 집단들은 공으로 차지한 사전私田을 확대시켜가고 거대한 장원
을 경영하면서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더해
갔다. 결국 토지제도는 왜곡되어 나라를
망가뜨려가고 백성들은 도탄에 허덕이게
된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이후 2대 정종, 3
대 태종, 4대 세종은 장자가 아니어서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왕위 찬
탈을 놓고 혈육까지 도륙을 한 이방원의
피의 향연은 이미 역사에 낭자하게 서술되
어 있다. 다행히 장자 승계한 5대 문종이 2
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13세 장자인 단종 사진 5. 세조가 하사한 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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