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2 - 고경 - 2020년 11월호 Vol.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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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김규진 글씨.

           느끼기에는 낡은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 더 고귀하다. 실로 보물이다.

             주련은 약사전藥師殿의 주련과 함께 구한말 서예가로 유명했던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 선생이 한예漢隸의 풍을 띤 예서로 썼다(사진 2).
           오랜 풍우 속에 변형이 생기기는 했지만, 나무판에 새길 때 김돈희 선생의
           필획을 잘 살려 새겼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김돈희 선

           생은 이준(李儁, 1859-1907) 열사가 법학 공부를 한, 우리나라 최초 법과대

           학인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를 졸업하고 검사 생활을 하며 집안의 전통과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근대 한국 서예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일

           제강점기에 한국 서예계를 지키며 발전시킨 인물이다. 서예가 손재형(孫在
           馨, 1903-1981) 선생의 스승이기도 하다.

             전등사에는 성당 선생과 같이 당시 서예계에서 양대 축을 이룬 해강海
           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쓴 ‘전등사’ 편액도 걸려 있다(사진 3). 일제강
           점기에 서화의 원리를 탐구하며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한 가치를 꿰뚫고 산

           일되는 문적을 하나라도 찾아 수집하여 우리에게 남긴 인물은 「근역인수槿

           域印藪」와 「근역서휘槿域書彙」, 「근역화휘槿域畵彙」를 남긴 위창葦滄 오세창(吳
           世昌, 1864-1953) 선생이다. 일제가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고 마구 챙겨나
           갈 때 만석의 재산을 가진 거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선생을 설

           득하여 이를 사들이도록 한 인물이다. 만석의 재산을 가진 거부 전형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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