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4 - 고경 - 2020년 11월호 Vol. 91
P. 134
정세를 직감하고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오랜 세월 산하를 떠도는 만해의 기행은 결국 존재의 깊어짐을 위한 수행
의 과정이었다. 그러던 1917년 12월3일 밤 오세암에서 좌선 중, 매서운 바람
소리와 눈보라 속에서 자연과 자신의 일체, 우주 속의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
는 깨달음을 얻는다. 지금까지 찾아 헤맨 고향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존재하는 세간으로서의 공간, 즉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자아에
서 진정한 고향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 깨달음의 시가 다음의 「오도송」이다.
도달한 그 곳이 바로 고향인 것을 男兒到處是故鄕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그네 근심에 쌓였던가! 幾人長在客愁中!
한 번 소리쳐 삼천세계를 깨뜨리니 一聲喝破三千界
눈 속에 복사꽃이 점점이 흩날리네. 雪裡桃花片片紅.
만해는 ‘삼천세계[우주]’의 거대한 힘의 유입을 느끼고, 그 순간 주객대립의
차별성을 극복하고 오도의 체험을 맞게 된다. 뜨거운 열정에 눈이 흐렸던 젊
은 시절의 흔적이 바로 자신이 찾아 헤매던 고향이었다. 어둠에 가렸던 공간
을 해체함으로써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만해 자신이
서 있는 이 땅이 바로 열반의 세계요, 일제하의 중생이 겪는 그 아픔자리가
바로 고향의 세계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었기에 그는 “한 번
소리쳐 삼천세계를 깨뜨리니 / 눈 속에 복사꽃이 점점이 흩날리네.”라는 사
자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돈오의 사자후는 곧 자타불이의 직관적 세
계를 말해 준다. 즉 바로 쏟아지는 눈 속에서 복사꽃을 본 것이다. 사실, 눈
과 복사꽃은 동일한 공간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동일한 공간에 존
재할 수 없는 것들을 함께 존재시킴으로써 묘유의 세계를 획득한다. ‘눈 속에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