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0 - 고경 - 2020년 11월호 Vol.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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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 버리고 자연물과 하나 되어 내적 일체감을 획득한다. 모든 경계를 허물
           고 내가 우주가 되고 우주가 내가 되는 경지를 지향하는 면모는 눈 오는 밤
           에 달과 매화, 오동나무와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 자연의 일부가 되는 모습

           을 한 폭의 산수화로 묘사한 「청한淸寒」에서 잘 드러난다.



                달을 기다리는 매화는 학인 양 서있고                      待月梅何鶴
                오동나무에 기댄 사람은 봉황인 듯도 하구나.                  依梧人亦鳳

                밤 새워 눈보라는 그치질 않았는데,                       通宵寒不盡

                초라한 지붕에는 눈이 내려 봉우리를 이뤘구나!   陋屋雪爲峰

             자연의 내적 질서를 자연스럽게 내면화 한 만해의 역사인식의 일면을 보여

           주는 시편이다.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가 달을 기다리며 학처럼 야윈다

           고 그려냄으로써 자연과 자연이 서로 조응하는 정경을 읽어 낼 수 있다. 인
           간은 자연의 겸손한 일원으로 동참함으로써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
           연에 내재된 대우주 질서에 편입된다.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비움으로써

           도달하는 자연과 하나 되는 이른바 여백의 미와 함께 인간 중심적 사유에 대

           한 전면적 반성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만해는 이와 같은 자연과의 교감과 조
           화를 바탕으로 마음을 맑히고 정신 수양을 깊게 해 나간다. 요컨대 많은 민
           족지도자들과 지성인들이 일제의 회유에 변절했지만 만해는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눈 속에 핀 복사꽃의 정신으로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

           의지를 시적 상상력과 비전으로 보여 주었다. 여기에는 온갖 차별에 대한 저
           항의지와 약자에 대한 자비심으로 올곧게 살아가고자 했던 만해의 생명사랑
           이 해방된 미래를 꿈꾸는 중요한 추동력으로 작용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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