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5 - 고경 - 2020년 12월호 Vol.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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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그러므로 그는 1852년 6월11일(음력) 하의荷衣의 열반으로 피로가 누
            적되었을 것이며 무더운 여름의 끝자락이었다는 점은 그가 설사병으로 거
            동할 수 없게 된 요인으로 작용되었을 것이다. 한편 차를 즐겼던 범해였지

            만 차를 보관해 두지 못한 연유는 무엇일까. 당시 대흥사 사중에는 차를

            즐기는 다수의 승려가 있었지만, 차를 보관해 두고 즐길 정도는 아니었다
            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기에 위급할 때 쓸 요량으로 보관해 둔 부인富
            仁의 차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범해의 「다약설茶藥說」은 당

            시 사중寺中에서는 소량의 차를 만들었던 정황을 드러낸 자료로, 조선 후

            기 사중의 경제력을 가늠할 수 있는 정보라 하겠다.
              범해는 「다구명茶具銘」에서 그가 사용한 찻그릇을 언급하여 어떻게 차를
            즐겼는지를 밝혔는데, 이는 그의 소박한 음다풍을 가늠하게 한다.




                맑고 한가한 삶은                   生涯淸閑
                차 몇 말뿐이라                    數斗茶芽
                찌그러진 질화로를 준비하여              設苦窳爐

                약하고 강한 불을 담았지               載文武火

                질 다관은 오른 쪽에                 瓦罐列右
                오지 찻잔은 왼 쪽에 두었네             瓷盌在左
                오직 차에만 힘쓸 뿐이니               惟茶是務

                무엇이 나를 유혹하랴?                何物誘我?



              위 인용문에서 범해의 차 살림 규모는 겨우 몇 말에 불과한 차를 소비
            했다는 것이다. 찌그러진 질화로는 그가 오랜 세월 차를 즐긴 다승이었음

            을 드러낸다. 더구나 차를 끓이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문무文武의 화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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