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9 - 고경 - 2021년 1월호 Vol.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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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한다는 것은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이 텅 비어있다는 것이다. 원자는 속
이 텅 비어있다. 우리 몸도 비어있고 모든 사물도 다 비어있지만, 그들 사이
에는 상호작용이 있다. 원자의 외곽을 도는 전자 사이의 반발력 때문이다.
물체의 형태를 유지해주는 화학결합만 있다면, 이 전기적 반발력 때문에 한
물체가 다른 물체를 통과하지 못한다. 그래서 몽둥이로 맞으면 아프고, 비어
있는 내 몸이 비어있는 의자 위에 앉을 수 있다. 아무런 내재적 가치가 없는
종잇조각의 효능으로 의식주가 해결되는 것처럼, 비어있지만 효능이 있다. 이
런 효능이 있으려면 물체의 형태를 유지해주는 화학결합이 있어야 하고,
화폐의 가치를 보장해 주는 중앙은행이 있어야 한다. 화학결합과 중앙은
행만 있으면 마술이 펼쳐진다. 우리 세계는 온통 마술이다.
연기 - 상입과 창발의 보편성 상입과 창발의 관계는 앞에서 논의한
예뿐 아니라 아주 보편적으로 성립한다. 이는 우선 인과 관계에서 언제나
성립해야 한다. 씨앗과 싹의 관계가 한 예다. 씨앗이 있어야 싹이 나오지
만, 씨앗이 있다고 싹이 반드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싹이라는 과果가 성
립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수분, 토양, 햇빛 등의 무수한 연緣이 씨앗이라는
인因에 침투해야 한다. 이 상입에 의해 물은 이전의 물이 아니고 씨앗은 이
전의 씨앗이 아닌 것으로 변한다. 이 상입에 따른 변환으로 씨앗과 물은 싹
으로 새롭게 나타난다. 이는 상입과 창발이 개입돼야만 연緣의 도움으로
인因이 과果로 변하는 시간적 인과의 연기緣起가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에서 논의한 원자와 분자, 글자와 단어, 단어와 문장의 관계는 상호 연
관과 의존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연기緣起를 보여준다. 이 연관과 의존의 관
계가 끝없이 전개되는 세계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원자가 모여 분자를, 분
자가 모여 생명물질을, 생명물질이 모여 세포를, 세포가 모여 생명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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