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고경 - 2021년 1월호 Vol.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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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설】 증득에 원증圓證과 분증分證 두 가지가 있다. 모든 부처님과 조사님
           들은 일체를 원만히 깨달아 성취하므로 원증이라 하고, 10지 보살을 비롯
           한 여러 성인들은 공부한 바에 따라 조금씩 부분적으로 성취하므로 분증

           이라 한다. 여기서 거론하는 ‘증득’이란 원증을 말하는 것이지 분증을 말

           하는 것이 아니다. 혹 이것을 아직 도상途上에 있는 3현 성인들의 분증이라
           오해한다면 이는 해오를 견성이라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종의 견성은
           증오, 즉 원증을 말하는 것이다. “견성하면 모든 것을 원만히 증득한다

           고 했는데 다시 무슨 수행이 필요한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수행

           을 한다.’는 표현 때문에 혹 “깨달은 뒤에도 수행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고 오해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깨달은 뒤의 수행이란 우리가 생
           각하는 그런 유위행有爲行이 아니다. 아무리 수행해도 수행함이 없고 무언

           가를 한다고 해도 하는 것이 없다. 말을 하자니 ‘수행한다’, ‘짓는다’고 표현

           했지만 도무지 하는 바가 없고 짓는 바가 없다. 닦을 것이 있고 할 일이 남
           아 있어 ‘수행한다’, ‘짓는다’고 한 것이 아니다. 일체를 초월해 자유자재한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을 ‘수행’이라 표현했을 뿐이다.

             그런 이는 일체 경계에 집착하지 않으니, 애착할 일이 무엇이 있고 경계

           에 물들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일체 시비선악의 그물에 걸리지 않으니 신
           묘한 불가사의 대해탈의 경계일 뿐이다. 이렇게 견성을 바로 한 사람은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얻어 억천만겁을 지난다 해도 자기에 미혹하지 않고 늘

           여여부동한 진여삼매의 경지에서 노니는 것이다. 억 만 번을 죽어 다시 태

           어나더라도 자성을 바로 깨친 이의 경계는 조금도 변동이 없으니, 허공이
           무너졌으면 무너졌지 깨친 이의 경계는 변동이 없다. 이런 깊은 경계를 증
           득해야만 견성이고 돈오고 오후보임이다. 따라서 ‘오후수행’, ‘오후보임’, ‘장

           양성태’란 유위행이 아니라 자성을 원만히 증득해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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