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5 - 고경 - 2021년 1월호 Vol.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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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인 것이다. 이것이 선문에서 말하는 견성의
            표준이다. 또한 견성 이후의 수증修證이란 유위의 수증이 아니라 물들이
            려 해도 물들일 수 없는 원만한 닦음과 증득이다. 10지·등각을 초월해 더

            이상 성취할 것이 없는 탕탕무애한 일상생활 그대로가 깨달음 후의 수증

            이고 보임이다.
              이렇게 구구절절이 설명을 하면 견성을 어렵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
            이다. 그러나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공부를

            부지런히 하다 보면 꿈에도 일여한 경계가 유지되는데 그러면 화엄 7지이

            다. 열심히 하면 몽중일여는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더욱 공부해 나가면
            깊은 잠에도 장애받지 않는 숙면일여가 되니 그러면 10지·등각 보살의 경
            계이다. 선문의 종사치고 몽중일여와 숙면일여를 거치지 않고 견성한 이는

            한 사람도 없다. 일체 번뇌망상이 사라진 그런 무심경계에서 바로 깨치면

            그것이 돈오이고 견성이다. 부처님과 달마 대사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그도 장부이고 나도 장부이며, 나라고 어찌 그의 불성과 다르겠는가? 부처
            와 조사라 하여 중생과 구분하지만 눈을 뜨고 뜨지 못한 차이가 있을 뿐

            어찌 자성조차 다르겠는가?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눈을 바로 뜬 이의 삶은 탕탕무애하니 대자유 그 자체이다. 두 눈을 훤
            히 뜨고 있으니 길을 잃고 헤맬 일도 없고, 넘어지고 엎어질 일도 없으며,
            가고 싶으면 가고 앉고 싶으면 앉으며 만사를 마음대로 한다. 이것이 보임

            이다. 허나 눈을 뜨지 못한 이는 밝은 대낮에도 돌부리에 채이고 나무 등

            걸에 걸려 넘어지고 엎어져 코가 깨지기 일쑤다. 돈오한 뒤에 다시 점수를
            논하는 이들은 대낮에 봉사가 횃불을 든 격이니, 조그마한 흙덩이로 허공
            과 견주려 들고 반딧불로 태양과 견주려 드는 어림없는 소리이다. 따라서

            고구정녕하신 고불고조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다른 길을 좇는다면 그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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