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3 - 고경 - 2021년 2월호 Vol. 94
P. 143
여 발행했고, 1917년에는 30본산 연합사무소에서 펴낸 『조선불교총보』의
편집부장을 맡았다. 또 이회광, 강대련 등 본사 주지들과 함께 3주에 걸쳐
일본불교의 실상을 시찰하고 왔다. 메이지유신 이후 문명개화를 추진해 온
일본불교의 근대화된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그는 다음 해에 결혼하
여 대처승이 되었다. 이어 1924년 7월에서 1931년 5월까지 약 7년 동안 월
간잡지 『불교』를 편집·간행했다. 1931년부터 1944년까지는 중앙불교전문학교
와 그 후신인 혜화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1941년에는 새로 창립된 조
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 종무원의 교학편수 상임위원을 맡았다.
그런데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까지 내선일체, 대동아공영권 등
을 내세우며 강제된 일제의 전시체제 아래서 친일부역행위를 함으로써 학자
로서의 생애에 큰 오점을 남겼다. 조선총독부가 기획하여 적극 추진한 심전
개발운동에 참여한 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국민정신총동원 및 국민총력 조
선연맹의 참사가 되었고, 조선임전보국단 창설에도 가담했다. 또 신문과 잡
지에 「종교계의 임전체제」, 「대동아전쟁과 대승불교」 등의 글을 기고했으며
각종 시국 강연에 연사로 초빙되기도 했다. 이때 나온 책이 호국불교를 앞세
워 불교도의 전쟁 참여를 독려한 『임전臨戰의 조선불교』(1943)였다. 이러한 친
일 경력으로 인해 그는 해방 후 1949년 5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회부되었지만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60년이 지나 「일제강점하 반민족행
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2009)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 찍혔다.
저명한 한국불교 학자이자 혜화전문의 교수였던 권상로는 1946년에 개
칭된 동국대학에서 계속 교편을 잡았다. 1952년 부산 피난 시절에는 대학
의 학장을 맡았고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동국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이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1962년 동국대 명예 철학
박사 학위와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또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중앙
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