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2 - 고경 - 2021년 3월호 Vol.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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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와 파미르 고원을 넘어 645년 초에 귀국하여 태종(太宗, 626-649)의 절
대적인 후원으로 불교경전을 한역하며 불교철학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사
실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의 불경 번역이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에 모
두 능통한 자가 한 것이 아니어서 승려들도 불교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데
는 상당한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승려마다 자기 수준에서 이해한
것을 고집하는 풍토도 있어 현장 법사는 이를 개탄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인도로 가기 전에 이미 유명한 고승들로부터 『구사론俱舍論』이나 『섭대승
론攝大乘論』을 익혀 명성이 널리 알려졌음에도 그가 알려고 하는 의문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아 태종 3년인 629년에 드디어 인류 역사에 일대 사건이
라고 할 인도행을 결행했다. 결국 17년간 인도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138개
국에 달하는 나라들의 정보와 함께 수많은 경전을 가지고 와 20년간 74부
1,335권에 달하는 불경을 번역하였다.
이런 신세계가 열리자 중국에서는 불경의 구역과 신역을 근거로 한 견해
들이 서로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미 현학玄學과
유학儒學 등을 두루 섭렵한 원광(圓光, 550-?) 법사가 진陳나라로 가서 승려
로 이름을 날리고 수隋나라가 건국된 뒤에 장안에서 무착 계열의 유식학
으로 명성을 떨치다가 660년 귀국하여 이를 신라에 전파하였다. 황룡사皇
龍寺를 중심으로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와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주도하며 국
가와 불교가 일체가 되는 기틀을 만드는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진골출
신의 자장(慈藏, 590-658) 율사도 이런 상황 속에서 유식학을 공부하고 선
덕여왕 7년인 638년에 당나라로 가서 유식학을 배워와 대국통大國統으로
큰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유식학은 현장 이전의 구유식론이었다.
현장이 번역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를 기본으로 전개된 신유식학을 터
득하여 신라에 전개한 사람들은 신라의 천재 원측(圓測, 613-696) 화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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