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0 - 고경 - 2021년 3월호 Vol.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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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불교 청년단체를 대표하여 독립운동
          자금 조달 등을 위해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를 방문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다시 출가 사찰인 영원사로 돌아왔고 다음 해인 1920년에는 함양 법화사

          의 주지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문명개화와 불교 근대화라는 시대 조류의

          확산 속에서 일본불교의 전철을 밟아 승려들이 결혼하는 풍조가 늘고 있
          었다. 그리고 이는 일본 유학승이나 혁신운동을 하던 청년 승려들에게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이러한 시대변화의 흐름 속에서 그 또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했는데 결국 40세가 되던 1923년에 대처승이 되었다.

           1928년에는 중앙학림에서 이름을 바꾼 불교전수학교에서 가르치게 되
          었는데, 이곳은 이능화, 박한영 등 당시 최고의 불교학자와 학승들이 교수
          진을 구성하고 있었다. 1930년에는 전수학교에서 다시 중앙불교전문학교

          로 개편되었고, 그는 1931년 5월부터 1932년 10월까지 이 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중앙불전은 1940년 6월 혜화전문학교로 교명을 또 다시
          개칭하였는데, 당시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대의 교수를 퇴임한 다카하
          시 도루가 이때 혜화전문의 학장이 되었다. 그런데 학장으로 취임한 다카

          하시가 박한영, 권상로 등 한국인 교수들을 파면시키자 김영수도 교수직

          을 그만두고 순천 선암사로 가서 주지를 하였다.
           1945년 8월15일 감격의 해방을 맞이한 후 1946년에 혜화전문이 동국대
          학으로 승격 재편되었다. 그는 다시 교수로 취임하여 불교사 등을 강의했

          고, 1948년 12월부터 1950년 4월까지 동국대의 학장(지금의 총장)을 맡았다.

          그런데 학장을 그만둔 지 두 달 만인 1950년 6월25일에 전쟁이 일어나 피
          난하여 낙향하였다. 이를 계기로 1952년에는 전북대, 1953년에 원광대의
          교수가 되어 이후 호남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57년에는 원광대에 한

          국불교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을 맡았고, 1961년에는 전북대에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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