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4 - 고경 - 2021년 3월호 Vol.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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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그의 설이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통설로서의 권위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은 채 그에 기반한 다양한 주장들이 파생되고 있다.
앞서 1930년에는 최남선이 원효를 내세우며 한국의 통불교 전통을 강조
하였고, 인도와 서역의 서론적 불교, 중국의 각론적 불교와는 달리 한국
은 결론적 불교를 세웠다고 하며 종합불교론을 내세웠다. 이에 대해 김영
수는 신라불교의 대표자인 원효의 화쟁, 고려시대 의천과 지눌이 추구한
선교융섭, 조선시대의 선과 강경, 염불을 함께 하는 삼문수업을 근거로 들
며 통불교적 전통을 더 한층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편 근현대기에 활발히 제기된 한국불교의 종명과 종조를 둘러싼 논란
에서 김영수는 이능화, 권상로 등과 함께 조선 후기에 정착된 임제태고법
통의 정통성을 지지하였다. 다만 그는 여말선초의 실상을 보면 선종의 종
명은 조계종이었고 태고 보우도 임제종이 아닌 조계종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렇기에 근대에 들어 원종, 임제종, 선교양종 등 다양
한 종명이 부침하였지만 일본의 선종과 구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계종
을 한국불교의 대표 종명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권상로 등과
함께 1930년대 후반 총본산 건립 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는데, 그 결과인지
실제로 1941년에는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 체제가 출범하게 되었다. 이처럼
김영수는 학자로서 한국불교 종파와 교단의 역사적 흐름을 체계화하는데
앞장서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조계종 종명과 중흥조 태고 보우의
조합을 만드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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